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슬 갑옷 (문단 편집) === 쇠퇴 === 확실히 사슬 갑옷은 통풍이 잘되고 착의와 탈의가 쉬우며 때에 따라선 보온 효과가 있는 갑옷이었지만 금속제련 기술발전으로 점차 그 한계가 나타난다. 12세기 연대기기록자 웨일스의 제랄드가 남긴 일화에 따르면, 당시 12세기 후반 웨일스의 국경선에서는 영국인 남작 윌리엄 드 브라오스가 보낸 병력과 웨일스인들 간에 산발적인 전투가 잦았는데, 웨일스의 [[장궁]]병이 말에 타고 있는 영국인 맨앳암즈를 쏘아맞추었더니 허벅지를 관통해서 말까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화살은 우선 그 맨앳암즈의 호버크를 뚫고, 그 아래의 쇼스를 뚫고, 그 아래의 가죽옷과 맨앳암즈의 허벅지를 관통해서, 가죽으로 된 말안장을 뚫어서, 말 몸통에 박혔다고 알려져 있었다. 다만 이는 과장된 것으로, 당시 대퇴부를 보호하는 갑옷은 쇄자갑이었으며, 반대편 다리에 화살 한 대가 또 박힌 것으로 확인된다.[* Osprey Publishing, Weapon 030, The Longbow, 66 페이지 참고.] 하지만 장궁만이 전장에서 두려운 것은 아니다. [[도끼]], [[창(무기)|창]], [[할버드]] 같은 무기들은 충분히 사슬갑옷을 상대할 위력이 있었고, 실제로 이런 무기를 가진 하층민이 기사들을 물리친 예는 여럿 있다. 1302년 플랑드르에서 벌어진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는 할버드나 [[모닝스타(무기)|구텐탁]] 같은 류의 무기를 가진 플랑드르인 민병대가 완전무장한 다수의 프랑스 정규군과 플랑드르 귀족 기사들을 물리친 적이 있고, 1315년 모르가르텐에서 스위스의 농민들은 할버드로 오스트리아 맨앳암즈를 박살내버렸다. 영국에서도 1314년 바낙번 전투에서 초기형 파이크 등으로 무장한 로버트 브루스의 군대가 영국왕 에드워드 2세의 군대를 물리치는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들이 사슬과 판금갑옷의 교차기에 있었던 중요한 전투란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지만, 이러한 전투들이 사슬갑옷 때문에 이기고 졌다고 말하는 것은 좀 넌센스고 전술, 사기, 각종 정황적인 요소가 훨씬 중요하다. 이는 유럽권의 경제성장에 힘입어 강화된 보병대가 기병대를 물리친 사례이지, 사슬갑옷이 취약점을 드러낸 사례가 보기는 어렵다. 사슬이 쇠퇴하고 판금이 등장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미 13세기 초반부터 서서히 이루어져가던 일이다. 사슬갑옷을 사용하면서도 팔다리의 보호를 위해서 판금으로 만들어진 [[트랜지셔널 아머]], 그러니까 [[판금 갑옷]]을 도입한 과도기적인 시대를 Transition Period라고 한다. [[판금 갑옷]]이 보편화되던 시대에 이르면 손이 많이가는 사슬갑옷의 제조비용이 판금의 가격을 뛰어넘는 일도 발생하게 된다. 거기다 체인메일이 판금갑옷 수준의 방어를 갖추려면 사슬을 더 촘촘하게 해야하는 비용도 문제지만 촘촘해진 체인메일은 체인메일의 장점인 통풍과 쉬운 착의와 탈의를 불가능하게 하기때문에 체인 메일의 장점이 없어졌다. 때문에 판금이 보급되기 시작하면 사슬갑옷은 도태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높으신 분들 일부가 판금갑옷과 천갑옷에 사이에 끼어 입는 경우는 있었다. 이렇듯 플레이트 아머가 더 가성비 좋고 방어력이 뛰어났지만, 체인메일만의 장점도 있고 해서 플레이트 아머가 쓰이던 시대에도 근근히 이어가다가[* 귀족들이 옷 속에 입기도 했고, 전처럼 껴입지 않았을 뿐이지 플레이트 아머의 부분부분을 체인 메일로 보완했다.], 갑옷의 사장과 함께 기나긴 체인 메일의 역사 역시 종지부를 찍는다. 17세기에 들어 일시적으로 동유럽에서는 쇄자갑을 약간 쓰긴 했다. 판금갑옷이 총기에 의미있는 방어력을 가지려면, 3 mm 이상으로 두꺼워져야 했기 때문에, 총탄 방어는 포기하고 칼이라도 막기 위해서 무겁고 비싼 판금갑옷 대신 보다 가볍고 편한 갑옷이 기병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그러나 서유럽에서는 [[버프 코트|소가죽으로 만든 코트]]가 유행했다. 폴란드에서는 셰프니케(쇠를 입은 자)라 불리는 중산층 징집 기병들이 체인메일 슈트를 입었고, 러시아도 마찬가지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이었을 뿐이고, 보병화력이 증가하는 17세기 후반에는 다시 퇴출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총을 맞으면 총탄이 박히는 충격 덕분에 사슬갑옷의 사슬이 부서져서 파편처럼 몸 깊숙히 박힌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렇게 박힌 사슬의 파편은 외과수술을 해도 100% 제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큰 문제를 일으킨다. 당장 [[보신 전쟁]]에서 사슬갑옷을 입은 막부군 정예 병력은 총탄을 맞을 경우 갑옷을 입지 않은 근왕측 병사보다 생존확률이 더 떨어졌는데, 일단 현장에서 과다출혈로 죽는 것은 기본이고, 현장에서 살더라도 사슬 파편 덕분에 파상풍에 걸려죽었다. 게다가 천운으로 살아남더라도 몸 안에 있는 사슬 파편 덕분에 육체적 노동을 요하는 일을 못하니 사실상 전투능력을 상실했다. 덕분에 전장에서 살고 싶다면 사슬갑옷 따위는 벗고 다니라는 격언이 퍼지게 된다. 그래서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총탄에 맞아도 갑옷파편으로 인한 부상이 상대적으로 드문 판금을 이용한 갑옷을 사용했고, 그 이후에는 갑옷 자체가 더 이상 방어력을 보장하지 못해서 쇠퇴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도 인도만이 19세기까지 실전 갑옷으로 쇄자갑을 이용했는데, 인도는 근대적인 군대와 포병을 운용하면서도 여전히 방패나 검, 갑옷을 애용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이는 전근대 냉병기 부대를 상대할 때가 잦았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